1. 개요 [편집]
빌베른 니에미이시에서 체결되어, 빌베른이 루이나의 차관을 도입하게한 조약이다.
2. 배경 [편집]
1910년대 초 빌베른 제국은 급속한 군비 확장과 식민지 경영 비용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하면서 대규모 외자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당시 해양 무역으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한 루이나 제국은 국제 금융 시장에서 가장 유력한 채권국이었고, 발달한 중앙은행 시스템과 풍부한 금 보유고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에 차관을 제공하며 금융 패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정부는 국내 자본 시장만으로는 재정 적자를 메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루이나로부터의 차관 도입을 최우선 방안으로 추진했다. 빌베른 재무장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트라보는 1911년 가을부터 루이나 재무부 및 중앙은행과 비공식 접촉을 시작했고, 양측은 1912년 초 정식 협상 개시에 합의했다.
정부는 국내 자본 시장만으로는 재정 적자를 메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루이나로부터의 차관 도입을 최우선 방안으로 추진했다. 빌베른 재무장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트라보는 1911년 가을부터 루이나 재무부 및 중앙은행과 비공식 접촉을 시작했고, 양측은 1912년 초 정식 협상 개시에 합의했다.
3. 전개 [편집]
1912년 3월 15일, 빌베른의 북해 연안 항구도시 니에미이에 위치한 제국호텔 대연회장에서 양국 대표단이 만나 금융조약 협상을 진행했다. 빌베른 측은 스트라보 재무장관을 수석대표로 중앙은행 총재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렉스, 외무차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란투스 등 10명의 대표단을 파견했고, 루이나 측은 재무장관 에드워드 해밀턴 경을 수석대표로 중앙은행 총재 조지 메이슨, 식민담당상 찰스 위트모어 등 8명이 참석했다. 협상은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빌베른은 6,000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 연 4.5% 금리로 요청했으나, 루이나는 빌베른의 재정 상태와 정치적 불안정성을 이유로 최소 7% 이상의 금리를 요구했다. [1]
또한 조약은 빌베른에게 여러 부가적 의무를 부과했다. 루이나 상품에 대해 빌베른 내 최저 관세율을 적용해야 하며, 실질적으로는 5% 이하로 고정되었다. 루이나 금융기관들은 빌베른 내에서 자유롭게 지점을 개설하고 영업할 수 있으며, 빌베른 기업이 발행하는 주식과 채권을 자유롭게 취득할 수 있다. 루이나 기업은 빌베른의 광산, 철도, 항만, 전력 사업 입찰에서 우선권을 갖는다. 빌베른 재무부는 루이나가 파견하는 5명의 재정 고문을 수용해야 하며, 주요 예산 편성과 세제 개편 시 이들의 사전 자문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조약은 발효 후 15년간 일방적 재협상이 금지되며, 빌베른이 조기 상환을 원할 경우 잔여 원금의 25%를 위약금으로 납부해야 한다는 조항까지 포함되었다. 니에미이 조약은 빌베른 원로원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정부 여당과 보수파의 지지로 1912년 5월 근소한 차이로 비준되었다.
니에미이 금융조약 체결 직후 빌베른은 일시적으로 재정 위기를 모면했다. 8,500만 달러의 차관금은 즉시 빌베른 재무부 계좌로 입금되었고, 정부는 이를 군함 건조, 철도 확장, 식민지 인프라 구축 등에 투입했다. 1912년 하반기 빌베른 경제는 일시적 호황을 맞았고, 실업률이 소폭 감소하면서 스트라보 재무장관은 "현명한 외교적 선택"이라며 조약을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1910년대 후반부터 상황은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빌베른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감당해야 했고, 수출 시장이 위축되면서 무역수지가 악화되었다.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빌베른 정부는 화폐를 무분별하게 발행했고, 데나화의 가치가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1914년 조약 체결 당시 1달러당 4.2데나화였던 환율은 1918년 전쟁 종료 시점에는 1달러당 7.8데나화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절하되었다.
문제는 니에미이 조약이 모든 상환을 금본위 달러 기준으로 규정했다는 점이었다. 조약 제3조는 "채무국은 매 분기 말일 금 1온스당 20.67달러의 고정 환율로 계산된 루이나 달러 또는 동등 가치의 금괴로 상환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데나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빌베른이 납부해야 할 데나화 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20년대 들어 이 추세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전후 경제 재건 과정에서 빌베른 정부는 계속해서 통화를 증발했고, 생산력은 회복되지 않은 채 시장에 풀린 화폐만 늘어나면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었다. 1920년 환율은 1달러당 12데나화, 1922년에는 25데나화, 1924년에는 48데나화로 폭락했다. 1925년경 데나화 가치는 조약 체결 당시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빌베른 정부가 실제로 납부해야 하는 분기 상환금은 조약 당시 예상의 두 배를 넘어섰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조약의 고금리 조항이었다. 7.5% 복리로 계산된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1925년까지 빌베른이 납부한 상환금의 절반 이상이 이자였으며 원금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빌베른 재무부 내부 보고서는 "현재 추세가 계속될 경우 30년 상환 기간 동안 총 납부액이 원금의 8배를 초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관세 수입의 60% 이상이 니에미이 조약 상환에 소진되면서 정부의 재정 운용 여력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국내 인프라 투자와 사회복지 지출은 대폭 삭감되었다. 빌베른 국민들은 세금은 계속 오르는데 정부 서비스는 악화되는 모순된 상황에 불만을 키웠고, "우리가 낸 세금이 루이나 은행가들 배만 불린다"는 비판이 거세졌다.
상환 압박이 심해지자 빌베른 정부는 1927년 3월 루이나 측에 상환 조건 완화를 공식 요청했다. 새로 취임한 빌베른 재무장관 퀸타 옥타비아 물리는 벨포르을 방문해 루이나 재무장관 윌리엄 셰일과 회담을 가졌고, "데나화 환율 변동을 감안한 상환액 조정", "이자율 인하", "상환 기간 연장"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루이나는 조약의 재협상 제한 조항(제8조: "본 조약은 발효일로부터 15년간 어느 일방도 조약 내용의 수정이나 재협상을 요구할 수 없다")을 근거로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셰일 재무장관은 "조약은 양국이 자유로운 의사로 체결한 것이며, 빌베른의 통화 가치 하락은 빌베른 정부의 무책임한 재정 운용 결과"라며 "루이나는 조약을 엄격히 이행할 것을 기대한다"고 못박았다. 이는 빌베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루이나에 대한 반감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빌베른은 어떻게든 상환을 이어가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는 시장에서 금을 매입하려 했으나, 이미 관세 수입의 대부분이 채무 변제에 소진되고 있었고 추가 금 확보를 위한 재원이 부족했다. 빌베른 중앙은행은 외환 보유고를 동원해 달러를 매입했으나, 이는 데나화 가치를 더욱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니에미이 조약 제4조는 "채무국은 금본위제를 유지해야 하며, 일방적으로 금 태환을 중지하거나 통화제도를 변경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어 빌베른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1928년 빌베른 정부는 긴축재정을 단행했고, 공무원 급여를 30% 삭감하고 연금을 동결했으며 공공사업을 중단했다. 이는 내수 경제를 더욱 위축시켰고, 실업률이 급등하면서 사회 불안이 고조되었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시작된 주가 대폭락은 곧 전 세계로 번졌고,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빌베른 경제는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주요 수출 품목이었던 기계류와 화학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감하면서 공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고, 수출액은 1928년 대비 절반 이하로 폭락했다. 실업률은 1929년 15%에서 1930년 28%, 1931년에는 35%로 치솟았다. 정부의 세수는 급감했고, 관세 수입마저 큰 폭으로 줄어들면서 니에미이 조약 상환금 마련이 더욱 어려워졌다. 1930년 1월, 빌베른 정부는 예정된 분기 상환금 620만 달러 중 380만 달러만 납부했고, 4월 분기에는 240만 달러만 납부하면서 사실상 부분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1930년 3월 12일, 빌베른 정부가 분기 상환금 지급을 연속 두 차례 완전히 이행하지 못하자 루이나 중앙은행은 니에미이 조약 제4조 제3항("채무국이 연속 2회 이상 분기 상환금을 지급하지 못할 경우, 담보로 예치된 금 전액은 자동으로 채권국 소유로 귀속된다")에 따라 담보 압류를 집행했다. 3월 15일, 루이나 중앙은행 총재 몬태규 노먼은 공식 서한을 통해 빌베른 중앙은행에 "니에미이 조약 위반에 따른 담보 금괴의 소유권 이전"을 통보했고, 벨포르에 예치되어 있던 420톤의 금괴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주장했다. 빌베른 정부는 즉각 항의했으나, 조약 조문은 명확했고 국제법적으로도 루이나의 조치는 정당했다. 3월 20일, 빌베른 중앙은행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금 준비금의 35%가 하루아침에 루이나 소유가 되면서, 빌베른의 통화 시스템은 근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금 보유고 상실은 당시 빌베른 데나화의 기반이었던 금본위제를 사실상 붕괴시켰다. 금본위제하에서 중앙은행은 발행한 화폐에 상응하는 금을 보유해야 하며, 국민은 언제든 화폐를 금으로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금 준비금의 35%를 잃으면서 빌베른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은 발행된 화폐량을 뒷받침하기에 턱없이 부족해졌다. 금 담보가 급격히 줄어든 데나화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국민들은 너도나도 은행으로 달려가 데나화를 금이나 외화로 바꾸려 했다. 이른바 뱅크런(bank run) 현상이 발생하면서 빌베른의 주요 은행들이 휴업에 들어갔고, 정부는 3월 25일 긴급 명령으로 금 태환을 일시 중지했다. 이는 사실상 금본위제의 포기를 의미했고, 데나화는 이제 아무런 실물 가치도 뒷받침하지 못하는 종이쪼가리가 되었다.
환율은 통제 불능 상태로 폭락했다. 1930년 3월 1달러당 52데나화였던 환율은 4월 78데나화, 5월 120데나화, 6월 195데나화로 폭락했다. 7월에는 1달러당 350데나화를 돌파했고, 8월 중순에는 420데나화까지 치솟았다. 1930년 중반 데나화 가치는 조약 체결 당시의 10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고, 빌베른 국민들은 휴지 조각이 된 자국 화폐를 믿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데나화 대신 루이나 달러, 플로렌시아 프랑, 심지어 이웃 소국의 화폐라도 외화면 무조건 선호했고, 금, 은, 보석 같은 실물 자산을 사재기했다. 상점들은 데나화 받기를 거부하거나, 받더라도 전날보다 몇 배 높은 가격을 요구했다.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빵 한 덩이 가격이 아침에 50데나화였다가 저녁에는 120데나화로 뛰었고, 월급을 받은 노동자들은 돈의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급히 물건을 사기 위해 상점으로 달려가야 했다. 당시 루이나의 소설가였던 조이 웰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돈다발을 손수레에 싣고 다녔고, 식당에서 식사를 주문할 때와 계산할 때 가격이 달랐다"고 한다.
환율 붕괴는 역설적으로 남은 차관 상환을 더욱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니에미이 조약에 따라 빌베른은 여전히 금본위 달러로 계산된 금액을 납부해야 했다. 1930년 7월 분기 상환금은 약 640만 달러였는데, 이를 당시 환율(1달러=350데나화)로 환산하면 22억 4,000만 데나화였다. 이는 빌베른 정부 분기 세수의 2.5배에 달하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빌베른 재무부는 "상환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선언했고, 1930년 7월부터 사실상 상환을 완전히 중단했다. 루이나는 즉각 조약 위반을 선언하고 추가 제재 조치를 예고했으나, 이미 빌베른 경제는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1931년 빌베른 정부는 공식적으로 대외 채무 상환 중단을 선언했다. 1931년 2월 5일, 빌베른 원로원은 "니에미이 조약 의무 이행 무기한 정지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고, 재무장관 물러는 성명을 통해 "빌베른은 불공정한 조약의 희생자이며, 루이나의 약탈적 금융 정책이 빌베른 국민을 파멸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했다. 루이나는 즉각 빌베른과의 모든 무역 관계를 중단하고, 빌베른 자산 동결 조치를 취했다. 국제연맹은 중재를 시도했으나 양국 모두 거부했다. 1932년 7월 23일, 빌베른 중앙은행은 공식적으로 지급 불능을 선언했고, 빌베른 제국은 사실상의 국가 부도(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빌베른 사회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실업률은 1932년 상반기 42%를 기록했고, 도시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중산층은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평생 모은 저축은 휴지 조각이 되었고, 연금으로 살던 노인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캄피톨랴 같은 대도시에는 실업자들의 판자촌이 생겨났고,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이 일상이 되었다.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이 만연했고, 자살률이 급증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32년 한 해에만 빌베른에서 15만 명 이상이 극빈과 기아 관련 원인으로 사망했다. 국민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사회 질서는 무너졌다. 거리에서는 좌파 노동자와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유혈 충돌이 일상화되었고,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후 지속된 정치불안은, 이자 탕감을 조건으로한 콘스탄티노폴의 양도가 콘스탄티노폴 독립[2]으로 이어지며 루이나의 자충수가된다.
또한 조약은 빌베른에게 여러 부가적 의무를 부과했다. 루이나 상품에 대해 빌베른 내 최저 관세율을 적용해야 하며, 실질적으로는 5% 이하로 고정되었다. 루이나 금융기관들은 빌베른 내에서 자유롭게 지점을 개설하고 영업할 수 있으며, 빌베른 기업이 발행하는 주식과 채권을 자유롭게 취득할 수 있다. 루이나 기업은 빌베른의 광산, 철도, 항만, 전력 사업 입찰에서 우선권을 갖는다. 빌베른 재무부는 루이나가 파견하는 5명의 재정 고문을 수용해야 하며, 주요 예산 편성과 세제 개편 시 이들의 사전 자문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조약은 발효 후 15년간 일방적 재협상이 금지되며, 빌베른이 조기 상환을 원할 경우 잔여 원금의 25%를 위약금으로 납부해야 한다는 조항까지 포함되었다. 니에미이 조약은 빌베른 원로원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정부 여당과 보수파의 지지로 1912년 5월 근소한 차이로 비준되었다.
니에미이 금융조약 체결 직후 빌베른은 일시적으로 재정 위기를 모면했다. 8,500만 달러의 차관금은 즉시 빌베른 재무부 계좌로 입금되었고, 정부는 이를 군함 건조, 철도 확장, 식민지 인프라 구축 등에 투입했다. 1912년 하반기 빌베른 경제는 일시적 호황을 맞았고, 실업률이 소폭 감소하면서 스트라보 재무장관은 "현명한 외교적 선택"이라며 조약을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1910년대 후반부터 상황은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빌베른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감당해야 했고, 수출 시장이 위축되면서 무역수지가 악화되었다.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빌베른 정부는 화폐를 무분별하게 발행했고, 데나화의 가치가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1914년 조약 체결 당시 1달러당 4.2데나화였던 환율은 1918년 전쟁 종료 시점에는 1달러당 7.8데나화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절하되었다.
문제는 니에미이 조약이 모든 상환을 금본위 달러 기준으로 규정했다는 점이었다. 조약 제3조는 "채무국은 매 분기 말일 금 1온스당 20.67달러의 고정 환율로 계산된 루이나 달러 또는 동등 가치의 금괴로 상환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데나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빌베른이 납부해야 할 데나화 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20년대 들어 이 추세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전후 경제 재건 과정에서 빌베른 정부는 계속해서 통화를 증발했고, 생산력은 회복되지 않은 채 시장에 풀린 화폐만 늘어나면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었다. 1920년 환율은 1달러당 12데나화, 1922년에는 25데나화, 1924년에는 48데나화로 폭락했다. 1925년경 데나화 가치는 조약 체결 당시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빌베른 정부가 실제로 납부해야 하는 분기 상환금은 조약 당시 예상의 두 배를 넘어섰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조약의 고금리 조항이었다. 7.5% 복리로 계산된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1925년까지 빌베른이 납부한 상환금의 절반 이상이 이자였으며 원금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빌베른 재무부 내부 보고서는 "현재 추세가 계속될 경우 30년 상환 기간 동안 총 납부액이 원금의 8배를 초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관세 수입의 60% 이상이 니에미이 조약 상환에 소진되면서 정부의 재정 운용 여력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국내 인프라 투자와 사회복지 지출은 대폭 삭감되었다. 빌베른 국민들은 세금은 계속 오르는데 정부 서비스는 악화되는 모순된 상황에 불만을 키웠고, "우리가 낸 세금이 루이나 은행가들 배만 불린다"는 비판이 거세졌다.
상환 압박이 심해지자 빌베른 정부는 1927년 3월 루이나 측에 상환 조건 완화를 공식 요청했다. 새로 취임한 빌베른 재무장관 퀸타 옥타비아 물리는 벨포르을 방문해 루이나 재무장관 윌리엄 셰일과 회담을 가졌고, "데나화 환율 변동을 감안한 상환액 조정", "이자율 인하", "상환 기간 연장"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루이나는 조약의 재협상 제한 조항(제8조: "본 조약은 발효일로부터 15년간 어느 일방도 조약 내용의 수정이나 재협상을 요구할 수 없다")을 근거로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셰일 재무장관은 "조약은 양국이 자유로운 의사로 체결한 것이며, 빌베른의 통화 가치 하락은 빌베른 정부의 무책임한 재정 운용 결과"라며 "루이나는 조약을 엄격히 이행할 것을 기대한다"고 못박았다. 이는 빌베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루이나에 대한 반감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빌베른은 어떻게든 상환을 이어가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는 시장에서 금을 매입하려 했으나, 이미 관세 수입의 대부분이 채무 변제에 소진되고 있었고 추가 금 확보를 위한 재원이 부족했다. 빌베른 중앙은행은 외환 보유고를 동원해 달러를 매입했으나, 이는 데나화 가치를 더욱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니에미이 조약 제4조는 "채무국은 금본위제를 유지해야 하며, 일방적으로 금 태환을 중지하거나 통화제도를 변경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어 빌베른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1928년 빌베른 정부는 긴축재정을 단행했고, 공무원 급여를 30% 삭감하고 연금을 동결했으며 공공사업을 중단했다. 이는 내수 경제를 더욱 위축시켰고, 실업률이 급등하면서 사회 불안이 고조되었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시작된 주가 대폭락은 곧 전 세계로 번졌고,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빌베른 경제는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주요 수출 품목이었던 기계류와 화학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감하면서 공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고, 수출액은 1928년 대비 절반 이하로 폭락했다. 실업률은 1929년 15%에서 1930년 28%, 1931년에는 35%로 치솟았다. 정부의 세수는 급감했고, 관세 수입마저 큰 폭으로 줄어들면서 니에미이 조약 상환금 마련이 더욱 어려워졌다. 1930년 1월, 빌베른 정부는 예정된 분기 상환금 620만 달러 중 380만 달러만 납부했고, 4월 분기에는 240만 달러만 납부하면서 사실상 부분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1930년 3월 12일, 빌베른 정부가 분기 상환금 지급을 연속 두 차례 완전히 이행하지 못하자 루이나 중앙은행은 니에미이 조약 제4조 제3항("채무국이 연속 2회 이상 분기 상환금을 지급하지 못할 경우, 담보로 예치된 금 전액은 자동으로 채권국 소유로 귀속된다")에 따라 담보 압류를 집행했다. 3월 15일, 루이나 중앙은행 총재 몬태규 노먼은 공식 서한을 통해 빌베른 중앙은행에 "니에미이 조약 위반에 따른 담보 금괴의 소유권 이전"을 통보했고, 벨포르에 예치되어 있던 420톤의 금괴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주장했다. 빌베른 정부는 즉각 항의했으나, 조약 조문은 명확했고 국제법적으로도 루이나의 조치는 정당했다. 3월 20일, 빌베른 중앙은행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금 준비금의 35%가 하루아침에 루이나 소유가 되면서, 빌베른의 통화 시스템은 근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금 보유고 상실은 당시 빌베른 데나화의 기반이었던 금본위제를 사실상 붕괴시켰다. 금본위제하에서 중앙은행은 발행한 화폐에 상응하는 금을 보유해야 하며, 국민은 언제든 화폐를 금으로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금 준비금의 35%를 잃으면서 빌베른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은 발행된 화폐량을 뒷받침하기에 턱없이 부족해졌다. 금 담보가 급격히 줄어든 데나화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국민들은 너도나도 은행으로 달려가 데나화를 금이나 외화로 바꾸려 했다. 이른바 뱅크런(bank run) 현상이 발생하면서 빌베른의 주요 은행들이 휴업에 들어갔고, 정부는 3월 25일 긴급 명령으로 금 태환을 일시 중지했다. 이는 사실상 금본위제의 포기를 의미했고, 데나화는 이제 아무런 실물 가치도 뒷받침하지 못하는 종이쪼가리가 되었다.
환율은 통제 불능 상태로 폭락했다. 1930년 3월 1달러당 52데나화였던 환율은 4월 78데나화, 5월 120데나화, 6월 195데나화로 폭락했다. 7월에는 1달러당 350데나화를 돌파했고, 8월 중순에는 420데나화까지 치솟았다. 1930년 중반 데나화 가치는 조약 체결 당시의 10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고, 빌베른 국민들은 휴지 조각이 된 자국 화폐를 믿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데나화 대신 루이나 달러, 플로렌시아 프랑, 심지어 이웃 소국의 화폐라도 외화면 무조건 선호했고, 금, 은, 보석 같은 실물 자산을 사재기했다. 상점들은 데나화 받기를 거부하거나, 받더라도 전날보다 몇 배 높은 가격을 요구했다.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빵 한 덩이 가격이 아침에 50데나화였다가 저녁에는 120데나화로 뛰었고, 월급을 받은 노동자들은 돈의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급히 물건을 사기 위해 상점으로 달려가야 했다. 당시 루이나의 소설가였던 조이 웰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돈다발을 손수레에 싣고 다녔고, 식당에서 식사를 주문할 때와 계산할 때 가격이 달랐다"고 한다.
환율 붕괴는 역설적으로 남은 차관 상환을 더욱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니에미이 조약에 따라 빌베른은 여전히 금본위 달러로 계산된 금액을 납부해야 했다. 1930년 7월 분기 상환금은 약 640만 달러였는데, 이를 당시 환율(1달러=350데나화)로 환산하면 22억 4,000만 데나화였다. 이는 빌베른 정부 분기 세수의 2.5배에 달하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빌베른 재무부는 "상환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선언했고, 1930년 7월부터 사실상 상환을 완전히 중단했다. 루이나는 즉각 조약 위반을 선언하고 추가 제재 조치를 예고했으나, 이미 빌베른 경제는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1931년 빌베른 정부는 공식적으로 대외 채무 상환 중단을 선언했다. 1931년 2월 5일, 빌베른 원로원은 "니에미이 조약 의무 이행 무기한 정지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고, 재무장관 물러는 성명을 통해 "빌베른은 불공정한 조약의 희생자이며, 루이나의 약탈적 금융 정책이 빌베른 국민을 파멸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했다. 루이나는 즉각 빌베른과의 모든 무역 관계를 중단하고, 빌베른 자산 동결 조치를 취했다. 국제연맹은 중재를 시도했으나 양국 모두 거부했다. 1932년 7월 23일, 빌베른 중앙은행은 공식적으로 지급 불능을 선언했고, 빌베른 제국은 사실상의 국가 부도(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빌베른 사회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실업률은 1932년 상반기 42%를 기록했고, 도시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중산층은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평생 모은 저축은 휴지 조각이 되었고, 연금으로 살던 노인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캄피톨랴 같은 대도시에는 실업자들의 판자촌이 생겨났고,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이 일상이 되었다.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이 만연했고, 자살률이 급증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32년 한 해에만 빌베른에서 15만 명 이상이 극빈과 기아 관련 원인으로 사망했다. 국민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사회 질서는 무너졌다. 거리에서는 좌파 노동자와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유혈 충돌이 일상화되었고,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후 지속된 정치불안은, 이자 탕감을 조건으로한 콘스탄티노폴의 양도가 콘스탄티노폴 독립[2]으로 이어지며 루이나의 자충수가된다.